찡한 소리

故 박경리선생의 마지막 詩 :옛날의 그 집"

the zoom 2008. 5. 5. 20:00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故박경리선생의 마지막 유작인 '옛날의 그 집'입니다.

 

총 3행으로 쓰여진 이 詩는 고인이 되신 박경리선생이

 

生의 마지막을 맞이한 고인의 심정을 내포하는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