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

<스크랩>중세 유럽의 결혼과 성(姓)

the zoom 2008. 12. 6. 01:54

얼마전 만화를 보다 재미있는 대사를 하나 발견했다.

"단지 나의 태를 이 가문에 팔았을 뿐이다."

귀족 집안과 결혼한 역시 귀족인 귀부인이 한 말인데, 말인즉 결혼이라는 것이 서로 좋아서, 사랑해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귀족인 여성의 태를 귀족인 남자 집안에 파는 계약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당시 유럽 귀족들의 결혼관을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연애결혼을 근대의 발명품이라 말한다. 이전까지는 연애결혼이 없었다는 것인데... 물론 아주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서로 좋아하더라도 집안의 허락이라는 절차가 중요하게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뭔 말이냐면 아무리 서로 좋아 죽고 못 살아도 집안의 허락이 없으면 결혼은 불가능했으며, 거꾸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할 정도로 싫은 사이라도 집안 사이에 결정이 있으면 결혼은 이루어졌다. 당사자의 의지란 단지 그 사이에 살짝 끼어드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그나마 결혼생활을 좀더 원활하게 하거나 그나마 최소한의 관계조차 불가능하게 하거나.

특히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집안과 집안의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작위와 영지와 재산과 정치적 영향력과 무엇보다 얼마나 이쪽 집안에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 그를 위해서는 자식이라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아들이든 딸이든, 심지어 가문의 후계자조차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팔아먹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에 불과했다. 결혼이란 그를 위한 명분이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고.

따라서 흥미롭게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의 순결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로마시대의 게르만족이라 하면 로마인과는 달리 성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기로 유명했고, 빅토리아 시대에도 여성의 순결이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 사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대부분의 시대에 사실상 순결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근대에 이르러서도 최소한 귀족의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순결이란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결혼하고 나서도 굳이 정조를 지킬 것을 요구받지 않았었다. 왜? 앞서 말한 대로 결혼이란 "태를 파는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여성의 자궁이지 여성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의 결혼이란 집안과 집안이 결혼하여 훌륭한 혈통의 자식을 낳는 것이었고, 그것만 가능하면 다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내가 결혼 전에 얼마나 문란했든, 그래서 결혼전에 사생아를 몇이나 낳았든, 결혼하고 나서도 여기저기서 염문을 뿌리고 사고를 쳐도 중요한 것은 아내의 가문이고 그 가문의 혈통에서 태어날 후계자이지 아내의 행실 자체가 아니었다. 남자 쪽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을 상대로 하는 고급 창녀에 사생아 하나 없는 상류층의 남성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그래서 유럽의 유명한 문호나 예술가의 일화를 보면 심심치 않게 끼어드는 것이 그를 후원하는 귀부인들이다. 때로는 미망인이거나 한데, 또 많은 경우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들이다. 과연 그들이 순수하게 예술가와 그의 후원자의 관계였을까는... 바람둥이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카사노바 역시 문학가로서 귀부인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물론 그 전설적인 여성편력의 비결은 그의 여성에 대한 사려깊은 다정함에 있었지만 말이다. 남의 말 잘 들어주는 것만큼 남의 마음을 잡아끄는 비결은 없는 법이다.

남자는 창녀나 다른 귀부인, 혹은 가수나 무희 등의 정부를 만나고, 여자는 다른 귀족의 남성이나 예술가, 지식인들을 만나 후원하며 그들을 정부로 두고, 말하자면 맞바람인데, 그것도 당시의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나의 일상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어차피 사랑이 있어 결혼한 것도 아니고, 집안의 이해에 따라서, 그리고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나 결혼한 사이인데 질투씩이나 할 정이 있을 리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할 수 있다면 밖에서야 무슨 짓을 하든 서로 상관하지도 않았고 간섭받으려 들지도 않았다. 아주 예외적으로 아내를, 혹은 남편을 무척 사랑해서 의리를 지키려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기대할 수 없는 사랑, 결혼생활에서 찾느니 밖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 상류층 사회에서의 하나의 교양이었다. 말하자면 바람이란 사랑도 정도 인간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의 결혼문화에서 그것은 그네들이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사치였으며 유일한 탈출구라 할 수 있었다.

유럽 궁정의 무도회는 그런 점에서 귀족들에게 있어 최고의 유흥장이었다. 흥겨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상류층 사회의 사람들을 만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이익이 되는 유력한 귀족에서부터 귀족사회에 명망이 높은 명사나 지식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누군가다. 적당히 상대를 물색하고 그러다 마음이 만나면 슬쩍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하고, 정원이거나 혹은 궁정의 어느 방이거나, 적당한 곳을 찾아 하룻밤 사랑을 불태웠다. 말하자면 원 나잇 스탠드의 원조랄까? 그러다가 정이 들면 애인이 되고 정부가 되고,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무도회에서 정치를 하고 토론을 하고 여론을 만들고 사랑을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란하다 할 정도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상류층 사회의 여성들에게는 절대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다. 남자쪽 혈통에 다른 혈통을 섞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남편의 가문에 팔린 자신의 태에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그것으로 남편의 가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혼 전에 몇 명의 남자를 사귀었어도 좋고, 결혼하고 나서도 이 남자 저 남자 숱한 남자를 만나 불륜을 저질러도 좋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금기였다. 그래서 상류층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 친정어머니로부터 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첫째는 피임에 대해서, 둘째는 만에 하나 임신이 되었을 때에 대해서. 그러나 당시의 의학수준에서 피임이란 그리 효과가 좋지 못했기에 대개는 후자인 뜻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대처법이 매우 유용하게 쓰였었다.

문제는 당시 의학수준에서 피임도 어렵지만 낙태는 더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술로도 한 번 임신한 아이를 지우려면 산모에게 적잖은 부담이 가게 된다. 하물며 당시 수준에서야. 더구나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기에 대부분의 낙태전문 의사들은 무면허였고, 그들의 낙태시술이라는 것도 매우 야만적인 위험한 것이었다. 낙태를 위한 약은 차라리 독약이라 할 정도로 독하고 부작용이 많았고, 수술이라도 하려 하면 갈고리를 여성의 자궁으로 밀어넣어 뱃속의 아이를 긁어내는 끔찍한 것들이 태반이었으니. 그래서 낙태수술 도중 죽은 여자도 많았고, 살아남았어도 그로 인해 평생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낙태의사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으며, 그에 대한 정보는 친정어머니에게서 딸로, 친구에게서 친구로, 상류층의 귀부인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교류되었다.

그러나 역시 워낙 위험한 수술이라 수술 자체를 거부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아무리 명예가 중요하다고 목숨까지 걸 일이 무에 있을까? 더구나 상류층 여성 쯤 되면 이미 누리고 있는 바도 결코 적지 않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일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작 임신 한 번으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란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는 대신 낳은 아이를 비밀리에 내다버렸다. 이것도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해지는 노하우였다. 누구에게 어떻게 시켜서 아이를 내다 버리느냐, 그 비밀을 유지하는 방법이나, 아이를 버리고서도 태연할 수 있는 독심은 마치 문파의 비전이 전해지듯 여성에게서 여성으로 그렇게 은밀히 전해졌었다.

버려진 아이들의 운명은 제각각이다. 조금 마음이 독한 여자들은 아예 아이들을 죽여버렸다. 그것은 매우 확실한 방법으로 당시 귀족이 머무는 도심의 강에는 아침이면 당연하다는 듯 아이의 시체가 떠다니고 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아예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어디엔가 묻어버린 경우는 더 많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경우는 고아원이나 수도원이나 조금 운이 좋으면 평민의 집에 약간의 댓가와 함께 맡겨졌다. 운이 아주 좋은 경우라면 생모가 버린 아이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어 어머니가 아닌 후견인으로서 그를 돌봐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대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로서 설사 장성해서 부모를 찾는다 해도 그 존재는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룰이었기에 그것을 어겼을 경우 끔찍한 댓가가 뒤따랐다. 그럼에도 때때로 그렇게 버린 아이가 장성해서 어머니를 찾는 바람에 적잖이 상류사회에 풍파가 일기도 했었지만.

개인이 발견되기 전 전근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가치는 역시 가문이었다. 현대의 가족과는 다르다. 가족이란 개인개인의 혈연적 유대라 한다면 가문은 개인을 부속품으로 하는 또 하나의 유기체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모든 생물종의 본능이기에 그 유전자를 매개로 엮인 가문이란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문이라는 이름 앞에 개인은 없었고, 개인의 모든 행동은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든, 미래든, 죽은 뒤에라도.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종을 남기고 또한 가문을 번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는 것이었다. 그 앞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필요한 사치였다. 다른 사치스런 것들이 다 그러하듯 다른 곳에서 구하면 그만이지 신성한 결혼에서 구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발견이 결혼생활에 끼친 영향이란 정말 지대하다 할 것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개인과 개인의 감정으로 서로 어우러지고 사랑하며 일생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물론 사랑이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그때처럼 마음놓고 바람피우는 것도 꽤나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엮인 만큼 그 감정이 희석되면 쉽게 헤어지게 된 것도. 그저 결혼의 부산물일 뿐인 아이들에 대해서까지 사랑의 감정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래서 근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발견으로 가족 역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도 개인이 전제되어야 가족인 것이니.

참 당연한 일인데 전혀 당연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의 일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도....